바르샤바 공항에서 노숙하면서 쓰는 스웨덴 교환학생 출국일지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의 철제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맞은편 의자에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친구가 다이어리를 쓰고 있고, 뒷편 의자에는 알 수 없는 외계어를 쓰는 아저씨들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13시간이나 되는 레이오버 시간동안 뭘 할까 고민하다, 그간 미루고 미루던 블로그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최종 목적지인 스웨덴에는 도착하지도 않았지만 그간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1. 중요한 건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두자
출발 직전까지 부모님께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던 소리가 ’여권이나 지갑 등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은 힙색에 잘 보관하라‘ 였습니다. 당연히 콧방귀를 뀌었죠. 알아서 잘 할 텐데 왜 저러실까. 그 오만한 생각은 비행시 탑승 직후 치료(!)당했습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았는데 여권이 안 보였거든요. 주머니를 두 번 뒤져도 보이지 않자 점점 식은땀이 났습니다. 이러다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나,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디다 떨어뜨린거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권이 제자리에 없는 걸 보니 미칠듯이 불안했습니다. 다행히 여권은 가방 앞주머니 (도대체 언제..ಠ_ಠ)에 들어있었습니다. 안도감과 동시에 여권과 지갑을 다시는 힙색 안에서 임의로 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비행기가 땅에 뜨기도 전에 힙색 안에 소중한 걸 항상 잘 보관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싼 값에 깨달았으니 말입니다.
2. 폴란드 항공 기내식은 비프와 치킨 둘 다 맛있다
여권을 찾느라 허둥대던 동안 옆자리에 앉으신 중년의 부부가 저를 침착하게(?) 격려해주셨습니다. ‘좀 전에 여권 확인도 받았는데 어딘가 있겠지~ 천천히 잘 찾아봐요‘라고 말씀해주시면서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몰톡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스몰톡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학교와 전공, 희망하는 진로, 파견 학교, 학사일정, 장학금 여부 등등 별 걸 다 말하고 있더라고요. 묻는 질문에만 답했을 뿐이었는데..옆자리 아주머니는 인터뷰의 달인이셨습니다.
아마 제가 딸뻘이었나봅니다. 젊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 한다며, 자기는 라운지에서 점심 먹고와서 배가 안 고프다며 기내식을 덜어가라고 하셔서..어쩌다보니 제 기내식인 비프와 함께 치킨도 먹게 되었습니다.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채식 위주로 식사한다고 하시긴 했습니다) 일단 감사했습니다. 사실 치킨 맛도 궁금했거든요. 아 근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저녁 기내식도 내주시면서 닭고기라도 먹고 가라고 내주셨는데, 덕분에 든든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말하는 걸 참 좋아하셨는데요, 요 근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마인드가 장착된 지라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신 것 같았습니다. 폴란드 항공 근처 숙소도 추천해주시고 여행지도 추천해주시고 (시칠리아는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여행 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교통편을 살 수 있는지도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메모장 앱을 커고 해주시는 말씀을 부지런히 타이핑하며 경청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최대한 여러 곳을 다녀보라고,,젊음이 좋다며,,좋은 말씀을 잔뜩 해주셨습니다. 친구들과 비행기 자리가 멀어 12시간 나내 입에 거미줄을 칠 뻔했는데, 아주머니와 간간히 맞장구 쳐주시는 아주머니 남편분 덕분에 무사히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3. 비행기에서 책을 읽을 줄은 몰랐는데
다운 받아온 더 글로리는 비행기 안에서 보기에는 수위가 세서 5분 만에 꺼버렸습니다. 민망하더라고요. 대신 가방에 넣어온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꺼냈습니다. 출국 일주일 전에 산 건데 출발 전까지 완독하지 못했던 책입니다. 몇 장 읽고 말겠지 싶었는데 술술 잘 읽히더라고요. 노이즈캔슬링 된 이어폰을 끼고 책에 집중하니 엉덩이의 얼얼한 감각도 덜하고 좋았습니다.
문득 가져온 책들이 전부 실존에 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챙겨왔거든요. 둘 다 정말 따스한 용기를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에 첫 관심을 가지게 만든 책인 <이방인>도 챙겨왔는데, 소설이라는 점에서 나머지 두 책과 결은 조금 다르지만 인간의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p.124)
이 밖에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노트북에 저장된 파일들을 싹 정리하고 (´∀`) 오프라인에 저장해둔 음악을 들으며 멍도 때렸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나이브스 아웃도 잠깐 봤습니다. 화장실 방향을 잘못 알아서 비즈니스석 화장실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하항..
처음으로 가족 없이 혼자 해본 장거리 비행이었는데 친절한 옆자리 이웃, 맛있는 기내식과 재미있는 책 덕분에 무사히 폴란드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입국심사관께 인사를 하니 같이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말랑해지던지요~(*´-`) 지금은 노숙 7시간째입니다. 새벽 4시에 열리는 맥도날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무사히 스웨덴에 도착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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