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퍼톤스 - Superfantastic

그런 날이 있습니다. 확률상으로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에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드는 때 말입니다. 이번주 금요일이 저한테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제가 듣는 수업의 금요일 세미나는 매주 할당된 아티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때 모더레이터moderator로 선정된 학생은 토의를 주도하고, 이후에 논의된 내용을 요약해 학생들 앞에서 발표해야 합니다. 모더레이터는 매 세미나 시작 시점에 교수님이 임의로 지정하십니다. 이날은 교수님이 제 이름을 다운으로 발음하면서 이게 맞는 발음인지 여쭤보시길래 제가 발음을 교정해 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하하 웃으시더니 제 이름이 인상에 남았는지 그대로 모더레이터로 지정해 버리셨습니다. 쥐엔장,, 가만히 있을걸~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일이었기에 I'll try my best라고 답했습니다.

이날 모더레이터로 토의를 진행하고 발표를 하면서 느낀 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1) 아티클을 더 꼼꼼하게 읽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2) 나는 포멀한 상황에서의 스피킹을 어려워한다 (3) 빠른 속도의 영어를 알아듣는 실력이 부족하구나였습니다. 발표는 정말 고역이었지만 애써 엉성하게나마 끝까지 마쳤습니다. 이전에 함께 피카 시간을 가졌던 애쉬마가 격려의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줘서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 교수님께 가볍게 영어에 대한 고민을 상담했습니다. 교수님은 많이 말하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자신은 집에서 아이들과 일부러 영어로 대화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아이들은 정말 복 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미 정답(해야 할 액션)을 알면서도 괜히 칭얼댄 것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의 말씀에 그저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평소처럼 음악을 듣지 않고 구독하는 영어 팟캐스트를 재생해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1.5배속으로 들으면서요.

모더레이터는 세미나 후에 동료들의 피드백 종이를 받게됩니다. 방에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종이들을 넘겨봤는데, 다들 너무나도 따뜻한 말을 해줘서 약간 울컥했습니다. 종이를 넘기다 마음이 따가워지는 글을 읽었는데, 알고 보니 그 종이는 제가 스스로에게 남긴 피드백 종이였습니다. 영어 공부에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습니다.

따수운 글씨체와 다정한 피드백..빨리 영어실력 늘려야지

오후에는 승쨩과 산책하기로 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제 혼자 갔던 산책로를 또 가보고 싶어서 제가 졸랐습니다.ㅋㅋ 이날도 하늘이 맑아서 산책하기 좋았습니다. 제가 갔던 길과는 조금 다른 길로 빠졌지만, 새로운 길도 한적하고 탁 트여있어서 상쾌하니 좋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새 한 마리가 귀엽게 앉아있길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근데 그 새가 똥을 싸더라고요. 다행히 제 머리 위로 조준하지 않아서 맞지는 않았습니다. 승쨩이 새 찍는 제 모습이 프로필 사진에서 본 자세랑 똑같다며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정말 똑같았습니다.ㅋㅋ

기숙사 올라가는 언덕길에 마주친 강아지가 폴폴거리며 저희 주변을 걸어 다녔습니다. 두 뒷다리를 들고 마킹을 하는데.. 코어힘이 세 보여서 부러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재미있는 드라마 같은 걸로 영어를 연습하라고, 다소 진부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조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산책에서 돌아온 뒤 넷플릭스를 켜서 재미있게 봤던 퀸스 캠빗을 영어 자막으로 한 장면 한 장면씩 뜯어보기 시작했습니다. I assume~, You should have seen that~, What do you say? 같은 표현들이 들리면 다이어리에 적고 따라 읽으면서 익숙해지려 했습니다. 빨라서 못 알아들은 대사는 대여섯 번씩 돌려보고 허공을 쳐다보면서 재생해 소리만으로 단어를 알아들으려고 했습니다. 확실히 영상으로 영어를 공부하니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단어를 쓰는 건지 훨씬 더 와닿았습니다. 반복해서 장면을 재생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없이 영어를 받아 적고 따라 하다 보니 수업의 충격으로 생긴 두려움도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오후 네시에는 지쨩과 함께 체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예약해 둔 그룹 수업이 있었습니다. 근데 버스를 잘못 타서 중간에 내려 걸어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수업에는 5분 정도 지각했는데, 버스에 내려서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저녁노을이 너무나도 예뻤기 때문입니다.

수업 시작 10분도 안 남았는데 길에서 사진 찍는 중

부랴부랴 체육관에 도착했는데, 아뿔싸..체육관 입장키를 안 가져왔습니다. 친절한 데스크 담당 PT쌤이 대신 입장 처리를 해주셨습니다. 왜 이리 덤벙댈까요~. 수업 이름은 리밸런싱 어쩌고였는데, 온몸을 잘근잘근 조지는 수업이었습니다. 중상급자 대상의 경악스러운 난이도여서 중간에 탈출하고 싶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참고 따라갔습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뭔가 아쉬워서 러닝머신을 조금 달렸습니다. 3km 정도 달렸는데, 오랜만에 달리니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러닝머신 때문에라도 정기권을 끊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갈 것 같긴 하지만요..

여기 체육관에는 정말 남사스러운 조형물이 매달려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지쨩과 이카에 들러 파스타 재료를 산 뒤 제 코리도어 주방에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좀 많이 만들었는데, 둘 다 배가 고팠어서 하나도 안 남기고 싹쓸이를 했습니다. 중간에 지쨩이 김치와 요거트를 가져와 같이 나눠먹었는데요, 2주 만에 먹는 김치는 정말 상큼했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 지쨩은 택배를 찾고 저는 식재료를 살 겸 이카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그동안 모아둔 페트병을 반환하고 이카 할인쿠폰을 받았습니다. 이카에서는 지쨩이 추천해 준 요거트들과 방울토마토, 그리고 다 떨어진 파스타면을 샀습니다. 방울토마토는 정말 달고 맛있었습니다. 지쨩이 추천해 준 망고 퓨레가 든 그릭요거트는 정말 정말 맛있었습니다. 이런 맛있는 걸 추천해 준 지쨩한테 고마웠습니다.

이날은 지쨩과 처음 둘이 만나 이런저런 일을 같이 했습니다. 다른 학교여서 서먹할 법도 한데, 둘이서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배려하는 성향도 비슷해서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지쨩이 성격이 정말 좋습니다! 승쨩도 그렇고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같은 빌딩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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